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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왜 식민지 건축을 말하는가
건축물은 사람이 발주, 설계·감리, 시공이라는 행위를 통해 만들어지는 인공물이다. 더욱이 하나의 건축물을 한 사람이 만드는 것은 드물고, 건축주의 발주, 건축가의 설계와 감리, 건설회사의 시공이라는 일련의 과정 속에 많은 사람의 협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나의 건축물은 건축주의 의향을 토대로 건축가나 건축기사 등의 전문가, 목공, 미장공, 벽돌공, 철근공 등과 같은 직인, 그리고 많은 노동자의 협력으로 완성된다.
따라서 건축에는 사람의 뜻이 반영된다. 달리 말해, '목적이 없는 건축'은 없다. 건축물 어디인가에는 그 목적이 반영되기 마련이고, 건축에 관여한 사람들, 특히 건축주의 목적이나 설계자의 뜻을 읽어낼 수 있다. 일본이 지배했던 지역의 건축을 살펴보는 이 책은 건축에서 지배 의도를 읽어냄으로써 지배를 다시 묻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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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식민지 건축
1 지배기구로의 청사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볼 때 조선총독부 청사 건설에 관여한 건축가·건축기사는 청사의 '위용'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위용'은 단지 신바로크 양식의 외관만이 아니라, 양질의 화강암으로 마감한 외벽, 건물 정면과 맞닿는 광화문 거리와 축선을 일치시킨 배치, 청사 앞에 있던 광화문의 이전, 내부에 설치한 거대한 홀이나 옥좌, 대리석 등을 사용한 마루나 당시 최첨단 디자인을 반영한 스테인드글라스 등의 내장, 그리고 매우 정교하게 배치된 난방 장치나 상시 온수를 제공한 급탕 설비, 오수 정화 장치, 벽에 묻어 넣은 소화전 등의 설비 등 많은 점이 중첩되어 연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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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국책회사 만철의 건축
만철이 초기에 건축물 본체를 벽돌 구조로 한 것은 내화·불연화 및 한랭 기후에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벽돌 구조는 필연적으로 서양풍 외관을 만든다. 만철 건축 조직이 벽돌 구조를 적극 추진한 결과 주변 시가지 또한 서양풍으로 이루어졌다.
오노기 등은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았다. 새로운 건물을 세울 때마다 시행착오를 반복하면서도 창의적인 고민을 했다. 오노기가 두 번이나 설계한 다롄의원 계획안, 여객 열차와 객선을 갈아타기 편리하도록 만든 다롄항 선객 대합소, 유럽의 최신 보양원을 참고한 남만주보양원, 오르내리는 여행객의 동선을 입체적으로 분리한 다롄역, 푸순 사택의 집중 난방 등이 그 예다. 그 가운데에는 '세계 건축'이라고 할 만한 것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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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식민지 건축과 네트워크
1 식민지 건축의 특징
당시 일본의 동아시아 지배는 서구 여러 국가의 협조와 인정으로 이루어진바, 일본의 지배 능력이 시험대에 오르게 되었다. 따라서 홍콩, 상하이, 톈진 등 서구 국가가 지배하는 동아시아 지역에 건립된 건물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자신의 지배력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서양 건축 규범을 따르는 건물로 지배에 필요한 시설을 정비하는 것이 유효했다. 유럽 국가의 지배지에 세워진 건물과 비교할 방법이 없거나 유럽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일본 건축 양식·의장을 띤 건물은 신사나 무덕전이라는 특수한 용도에 국한되었다.
... 그러나 만주사변이 발발하면서 유럽의 동아시아 지배틀에서 벗어난 일본은 타국에 능력을 인정받을 필요가 없어지게 되었고, 동아시아에서 유럽의 건축과 비견될 건축을 할 이유도 없어졌다. 바꿔 말하면, 만주사변 이후 동아시아 질서 구축에 일본이 스스로 중심이 되었고 더 이상 일본의 지배기관은 유럽의 건물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건물을 세우지 않아도 되었다. 그 결과, 상대적으로 동아시아의 전통 건축 양식·의장이 중시되기에 이르렀다. 중국풍 지붕뿐 아니라 '궐'이라는 중국 전통 건축 양식을 사용해 베이징 고궁의 양식을 닮은 지붕을 얹은(궁전식) 만주국 국무원 청사가 상징적인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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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식민지 건축을 뒷받침한 네트워크
건축을 예로 살펴볼 때, 일본의 지배지는 일본이라는 본국 아래 예속된 것이 아니라 지리적으로 접해 있던 외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일본 제국이라는 틀보다 넓은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북동아시아라는 틀 안에 자리 잡고 있었다. 각 지역에 세워진 건물을 보거나 정보를 얻음으로써 그곳에서 활동하던 일본인 건축가들이 건축에 관한 당시의 최첨단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일부이긴 하나 일본의 식민지 건축이 세계 건축일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의 식민지·지배 지역이 인근 지역과의 관계 속에서 경우에 따라 세계적인 규모로 자리매김되게 하는 시스템이 뒤받침되었기 때문이다.
... 일제 점령기에 한국과 대만에 세워진 건물을 볼 때 생기는 복잡한 마음을 좀 가볍게 해주는 책이다. 잘 만들어야 하는 목적과 필요를 가지고 만든 건물들이라 좋아 보이는구나 싶다. 만주국 시대 만들어진 건물에 관한 설명도 흥미로웠는데 볼 기회가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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