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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주중화민국대사관 근무 (1990년 2월 - 1991년 8월)
당시 중화민국의 한국에 대한 입장과 태도를 살펴보면, ① 국제사회에서 중화민국의 고립이 심화되고 있는 가운데 한국이 과거 중화민국의 한국 독립 투쟁과 건국 지원 사실을 잊고 중국과의 관계 개선 과정에서 자신들과의 관계를 소홀히 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그간 일련의 사건으로 불만이 누적되어 왔으며 ② 국민 일부가 중화사상에 여전히 젖어 있어 한국의 경제 발전을 비롯한 국제사회에서의 위상 제고를 객관적으로 평가하지 않고 한국에 대한 잠재적인 우월 의식을 계속 갖고 있으며 ③ 양국이 아시아의 "4마리의 용"으로 함께 주목을 받으면서 한국을 대외 경제면에서 경쟁 상대로 인식하고 있었다. ...
돌이켜 보면 1980년대 들어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공식화하면서부터 1992년 8월 단교 시까지 한국 외무장관, 차관의 중화민국 방문이 한번도 없었는데, 전통적 우방이자 인근국과의 관계에서 정상적인 상황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염두에 두고 한국 측이 의도적으로 중화민국 방문을 자제한 것으로 보이나 그러한 외교행태가 과연 한중 관계에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 의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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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주중화민국대사관 근무(1991년 8월 - 1992년 8월)
중국은 한국과의 수교 진행 과정에서 남북한 각각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외교 일정을 주도하는 방식을 통해 중국 입장을 최대한 유리하게 확보해 나간다. 중국 측이 한국 측에 2일 전에 통보하여 성사된 10월 2일 한국과의 첫 번째 외무장관 회담이 10월 4일 김일성 방중 직전에 개최된 것은 우연이라 볼 수 없다. 김일성 방북 직전에 첫 번째 한중 외무장관회담 개최를 통해 한국 측의 사의와 높은 평가를 확보하고 북한 측의 항의를 최소화하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중국은 한국과의 수교 교섭 과정에 남북한과의 각각의 외교 일정은 물론, 일본, 남아공 등 주요 이해 당사국과의 외교와 양안 관계도 함께 고려하여 전체의 외교 일정을 주도적으로 정해 나간다.
장 부국장은 제1차 예비회담 시 "한국 측 태도를 감안하여 장루이졔 대사가 중국의 대만 문제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한국이 중국과 수교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중화인민공화국이 중국의 유일한 합법 정부이며 대만을 중국 영토의 불가분의 일부분임을 승인하고 대만과 단교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에 대해 권병현 대사도 한국 측 입장을 설명하였는데 한국 측은 사전에 중국과 다른 나라와의 수교 자료를 연구하여 중국 입장과 원칙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으며 특별히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았다. 다만 한국 측은 '한국과 대만 관계가 특수하다'고 강조하면서 중국이 한국 측에 기준을 완화하여 한국이 대만 관계 처리 시 되도록 더 큰 유연성을 갖기를 희망하였다. 이는 한국 측이 대만 문제에 있어서 환상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고 기술하였다.
이렇게 중국은 4월 13일 중국 측의 수교교섭 개시 제의 이후, 한국 측의 최우선 순위가 조기 수교와 노 대통령의 방중이며 가능하면 정상회담을 통한 수교 발표임을 간파하여 한국 측의 양보를 최대한 확보하여 만족할 만한 합의를 도출해냈다. 한국 측으로서는 6월 21일 수교 공동성명 문안 합의 후에도 여전히 조기 수교 발표와 노 대통령 방중을 실현해야 하는 만큼 결국 중국 측 제의에 계속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
이러한 첸푸 부장의 입법위원과 언론 매체에 대한 적극적인 설명과 관련, 당시 『중국시보』 주리시 주필은, "중화민국 당국이 청천벽력과 같은 단교 소식을 먼저 발표한 것은 과거의 단교 사례와 확연히 달랐으며 단교 소식이 타이베이로부터 서울 외신 매체로 타전 되면서 모두가 사실 확인에 나서게 되었으며, 첸 부장이 국민의 공분을 일으키려고 한국을 비난하고 여론에 기대어 자신의 외교 실정(失政)에 따른 잘못과 책임을 떠넘기려 했다"고 하면서, "첸 부장 개인적으로는 미국 예일대학 박사논문이 '한미통상조약 체결과정에서 청조(淸朝)의 역할'이었는데 시종일관 대중화우월의식, 즉 종주국과 속국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어 속국으로부터의 배신은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에 단교 책임을 모두 한국에 돌림으로써 반한 의식을 조장하려 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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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부 단교를 둘러싼 주요 쟁점 검토
일본은 수교 발표 12일 전에 타이베이에 특사를 보내, 다나카 수상 명의의 장제스 총통 앞으로 사전에 정중한 친서를 보내고, 중국과 9월 29일 수교 공동서명 직전에 다나카 수상은 다시 친전을 장 총통 앞으로 보냈다.
미국은 중국과의 수교 및 중화민국과의 단교 시점 15일 전이며, 이에 관한 공식 발표 7시간 전에 현지 미국 대사가 장징궈 총통에게 알려 주었으며, 이어 정식 단교 5일 전에 국무차관을 타이베이에 보내서 경위 설명과 미래관계에 관한 공식적인 교섭을 시작했다.
일본, 미국의 경우 모두 중화민국 정부와 국민의 강력한 반발을 부릅 쓰고 현지에서의 데모대와의 조우 등 불미스러운 사태를 예상하고, 특사 또는 국무차관을 타이베이에 파견하여 중화민국의 최고 지도자에게 친서 등을 통해 단교의 뜻을 직접 전했다. 미국은 단교전에 미래관계에 대한 공식 협상을 시작했다.
... 500페이지가 넘는 책인 데다 지나치게 상세한 부분도 많아서 어렵게 읽었다. 그래도 외교관의 관점에서 대만 단교를 살펴볼 수 있어 흥미로운 지점들이 많다. 사건이 있을 때마다 불려다니는 걸 보고 있으면 내가 숨이 찰 지경.
... 단교 과정에서 한국이 외교적인 결례를 범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대만 측의 대응 역시 매끄럽지 못했다는 것도 안타깝다. 특히 첸푸 외교부장의 태도가 많이 언급이 되는데, 당시 대만의 외교를 책임진다는 게 얼마나 어려웠을지는 또 동정이 가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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