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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구경하는 사회 - 김인정

TheEnd 2024. 3. 18. 19:55

들어가며 | 고통을 보여주는 일

 

 고통의 필터이자 고통의 확성기가 된다는 선천적 모순에 휩싸여, 기자들은 매 순간 저울질을 한다. 어떤 고통을 보여줄지, 이 보여주기가 윤리적인지, 혹은 어떤 고통을 가릴지, 이 가림이 윤리적인지에 대해. 실패하면 누군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줄지도 모르는 이 저울질을 하릴없이 아슬아슬하다. 상황에 따라 들쭉날쭉 변화하는 기준에 부응하는 일은 어떤 불가능하고 위태로워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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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새롭고 특별한 고통이 여기 있습니다

좋아요와 리트윗, 그 이상

 

 대신 저널리즘은 목격 자체를 전달한다. 사진과 영상은 때로 너무나 직접적이라 마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느끼게 하여 보는 사람을 목격자의 자리로 끌어온다. 행동을 촉구하는 한편 그에 따른 죄의식이나 부채 의식, 때론 지켜보는 우리는 무고한 사람이라는 면죄부 역시 함께 전달하거나 위임한다. 따라서 기자들에게 하나의 기사나 촬영이 윤리적이었는지에 대한 완전한 판단은 대개 꽤나 시차를 두고 일어난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평가 범위에는 시청자들의 관심과 행동, 세상의 움직임까지가 포함되기 때문이다. 이는 사람들이 보고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면 결국 대규모 구경이 되어버릴 위험성이 생긴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사고 현장을 둥글게 울러싸고 카메라를 든 채 지켜보는 구경꾼들처럼.

 

 고통의 전달자가 늘어나고 있는 현상을 고통을 효과적으로 알리는 데 긍정적일까? 아니면 구경꾼을 양상하는 데 기여하고 있는 것뿐일까? 전달은 행동의 일부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좋아요와 스크랩 기능이 관심 자본의 주축이라는 걸 고려할 때, 사람들이 조금씩 시간을 쪼개 기꺼이 고통의 건베이어 벨트 앞에 선 노동자로 참여하는 현대 사회는 고통을 다루는 데 조금 더 적극적이게 된 셈일까?

 이 모든 질문에 선뜻 답변하긴 어렵지만 적어도 영상을 찍고 전달한 사람들은 고통의 중개인인 동시에 현장의 목격자로서, 두 역할에 따라붙는 윤리적 딜레마의 촘촘한 그물망에서 도무지 실패하지 않기 어려워진다는 건 확실해 보인다. 촬영의 의도부터 영상을 공유하는 매체와 방법을 결정하는 것까지 윤리가 개입할 수 있는 빈틈은 너무나 많고, 미끄러질 틈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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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과 좋아요, 알림 설정까지

 

 고통의 포르노 운운하기 전에 인터넷이 불러온 진짜 문제는 우리를 기다리는 죄책감의 총량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통을 보고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자각은 죄책감과 무력감의 원천이 된다. 동시에 사건 바깥에서 비난하는 무고한 위치에 자신을 놓고 정의감에 빠져들거나, 거리감을 핑계로 죄책감으로부터 도망하기도 쉽다. 전에는 언론사들에게만 맡겨져 있던 뉴스의 생산과 유통의 몫이 얼마간 이용자에게까지 넘어가며 책무 역시 분산됐다. 사람들은 숱한 플랫폼을 통해 타인의 고통에 반복적으로 노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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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타인의 고통에 공감한다는 착각

재해는 어떻게 문화가 되었는가

 

 흔한 사고일수록, 어디서나 보이는 사고일수록 그 고통을 보는 일에 능숙해지고, 주기적으로 비슷한 소식을 들은 나머지 거의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만다. 결국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사회문제가 '계속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이야기되지 않는다는 패러독스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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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이 혐오가 될 때

 

 보도란 '누군가의' 고통과 어려움에 대해 말하는 일이고, 그 하나하나의 고통 역시 누군가에게 속한 것이기에, 취재를 통해 고통에 침범하는 일은 결국 누군가의 삶에 침입하는 일이었다. 어떤 고통이 문제라고 말하는 건, 고통이지만 끝내 당신의 것인 무언가가 잘못됐다고 지적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왜 이걸 취재하는지 잘 이야기하고 동의를 받은 것만으로는 다 무를 수 없는, 취지가 좋은 것만으로는 다 메일 수 없는, 취재 자체가 사람들에게 남기는 상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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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나와 닮지 않은 이들의 아픔

우리가 알고리즘 밖으로 나올 수 있다면

 

... 앞서 언급된 저널리즘의 실패 사례들은 놀랍게도, 어느 정도는 무관심을 비집고 잘 전달해 보고자 하는 마음에서 출발했을 수도 있다. 불행히도 '닮음-우리'는 거의 필연적으로 '닮지 않음-다름-그들'이라는 대조항을 소환한다. 우리의 평화와 행복을 엄호하기 위해 그들을 반대편으로 몰아낸다. 더러움과 추함, 폭력과 불행을 우리 바깥으로 쓸어낸다.

 이런 비유에서 범박하게 묶이는 나/우리의 범주는, 주로 세계에 이미 존재하는 구분점인 인종, 계급, 국가, 지역, 세대, 성별 등을 모방해 선명성을 확보하는 경우가 잦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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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세계의 뒷이야기를 쓰기 위해서

연민이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고 해도

 

 일상을 살아가며 연민을 잊지 않는 일에는 노력이 필요하고, 그 균형과 전환 사이에서 기이한 파열음이 나는 게 전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의 변화라는 건, 개인들의 자유로운 반응 속에서 일어나는 예기치 못한 화학작용이 사회에 영향을 미치며 발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희망도 절망도 없이 그 자유를 지켜볼 수 있을지를 더 자주 곱씹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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