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함락 1945 - 앤터니 비버

TheEnd 2023. 12. 15. 17:04

3. 불과 칼과 '고결한 분노'

 

 소련 당국은 스탈린이 1941년의 재난에 대해 비난받지 않도록 소련 인민에게 조국의 침략을 허용한 집단 죄책감을 세뇌시키는 데 성공했다. 억압된 죄의식에 대한 속죄가 보복의 폭력성을 증대시켰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거의 없다. 하지만 폭력의 많은 동기는 훨씬 더 단순했다. 제3군의 정치장교 드미트리 셰글로프는 독일의 식량 창고를 본 병사들이 어디서나 발견되는 "풍요로움에 혐오감을 느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들은 독일 가정의 잘 정돈된 모습에 질색했다. 그는 "나는 단정하게 늘어선 통조림과 병들을 주먹으로 깨부수곤 했다"라고 썼다. 붉은 군대의 병사들은 그렇게 많은 가정에 라디오가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들의 눈으로 본 증거는 지금까지 들었던 것처럼 소련이 노동자와 농민의 천국이 아니라는 얘기였다. 동프로이센의 농장들은 당혹감, 질투, 감탄, 분노가 뒤섞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면서 정치장교들을 당혹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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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패자는 비참한 법!

 

 하지만 독일 과학 장비는 그 장비를 만든 인간 설계자보다 다루기가 훨씬 어려운 것으로 드러났다. 모스크바로 가져간 대부분의 장비는 정밀 공학에 적합한 환경과 가장 순수한 원자재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쓸 수가 없었다. 베를린 약탈에 참여했던 한 소련 과학자는 "사회주의는 다른 나라의 기술 인프라를 죄다 가져가도 그 자체로는 이득이 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창문이 모두 깨진 상태였기 때문에 베를린 시민들은 매일 밤 비명을 들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베를린의 두 개 주요 병원은 강간 피해자 수를 9만5000명에서 13명 정도로 추산했다. 한 의사는 베를린에서 강간당한 10여 만 명의 여자 중 1만 명 정도가 사망했으며 대부분 자살이었다고 추론했다. 사망률은 동프로이센, 포메라니아 그리고 슐레지엔에서 고통받은 140만 명의 사망률보다 훨씬 더 높은 것으로 생각된다. 모두 합쳐 최소 200만 명의 독일 여성이 강간을 당한 것으로 추정되고, 다수는 아니더라도 상당수를 차지하는 여성들이 두 번 이상 당한 것으로 보인다. ...

 

 강간의 정의는 성적인 압박으로 의미가 흐려졌다. 굶주림에 직면한 여자들에게는 총이나 육체적 폭력이 필요 없었다. 이것은 1945년 독일에서 전개된 강간 양상의 세 번째 단계로 설명된다. 네 번째 단계는 많은 소련군 장교가 소련  '운동원 아내'를 대체한 독일 '점령군 아내'와 함께 정착한 이상한 형태의 동거였다. ...

 젊은 해군이 다가온 다음 익명의 일기 저자는 한 교양 있는 소련 소령이 제공하는 보호와 풍부한 식량을 받아들여 스스로 매춘부가 될까 생각했다. ... 하지만 무엇이 강간이고 무엇이 매춘인지에 상관없이, 음식을 얻고 보호를 받기 위한 이런 계약은 여자들을 원시적인, 태고의 상태로 돌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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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백마 탄 남자

 

 스탈린과 원수들은 병사들의 목숨을 신경 쓰지 않았다. 베를린 작전에 참가한 세 개 전선군의 사상자 수는 사망 7만8291명, 부상 27만4184명에 달했다. 러시아 역사학자들조차 이제는 이토록 많은 사상자가 불필요하게 발생한 이유가 어느 정도는 서방 연합군보다 먼저 베를린에 도착하기 위한 경쟁 때문에, 그리고 너무나 많은 병력을 베를린 공격에 투입함으로써 아군끼리 포격을 가한 탓임을 인정한다.

 조국을 위해 싸우다가 불구가 된 사람들에 대한 대우 또한 비정했다. 운 좋게 살아남은 자들은 "보로디노(모스크바 서남쪽에 위치. 1812년 쿠트조프가 이끄는 러시아군과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싸운 옛 전쟁터)에서 다리를 하나 잃은 사람들이 의지해 걷던 나무 조각 같아 보이는 의족을 받으려고 오랜 시간" 줄을 서야 했다. 하지만 곧 주요 도시의 당국은 팔다리가 없는 '사모바르들' 때문에 도시의 거리가 흉해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결정했다. 따라서 그들은 붙들려 추방됐다. 그들 중 많은 사람이 마치 그들 역시 굴라크의 죄수라도 되는 양 더 북쪽에 있는 벨라야 제믈랴로 보내졌다.

 

 스탈린의 반유대주의가 얼마나 깊게 퍼졌는지 혹은 트로츠키에 대한 혐오감이 스탈린의 반유대주의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를 파악하기는 매우 어렵다. 어느 정도는 트로츠키의 국제주의 때문에 스탈린은 유대인들을 국제 네트워크의 일부로 보고 의심했을 수도 있다. '세계주의'는 배반을 암시했다. 스탈린이 사망하기 직전 '박사의 음모'에 자극을 받은 반유대주의 히스테리가 생기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스탈린은 조지아 출신이었지만, 러시아인 우월주의자였다. 나폴레옹이나 히틀러 같은 외국 인물들처럼 그는 자신을 국가라는 장막으로 감쌌다. ...

 

 한 독일 장교의 명예에 관해 끊임없이 얘기하는 장군들에 대한 심문을 통해 놀라운 논리적 왜곡이 드러났다. 연합군 최고 사령부의 공동 정보위원회는 '왜곡된 도덕 관념' 때문이라고 했다. 300번 이상의 면담을 근거로 한 보고서는 "이 장군들은 '성공한' 모든 행동은 인정한다. 성공은 정당한 것이다. 성공하지 못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 친나치 장군들의 진술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독일 국민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공통된 생각을 대변했다. 한 종족을 말살하거나 포로들을 학살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는 생각을 거의 하지 않는다. 독일의 범죄에 대해 그들이 느끼는 유일한 공포는 연합군이 어떤 터무니없이 부당한 이유로 자기들더러 연루됐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라고 결론 내렸다.

 

 

 

... 러시아에 관한 책을 더 읽어보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