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운드제로 - 이거옌

TheEnd 2023. 4. 10. 20:13

12 | 원전 사고 D+580

 

... 이전에 공사할 때부터 다들 제4원전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고, 돈 퍼주는 펌프라고 생각했다. (천홍츄는 갑자기 며칠 전 꾼 괴이한 꿈이 떠올랐다. 대형 마트에서 곧 불이 나가려는 형광등이 깜빡거렸고, 고장 난 현금지급기가 쉬지 않고 지폐를 내뱉었다. 천 위안짜리 지폐가 한 장 한 장 사방 천지에 가득 쌓였다. 미친듯이 지폐를 주워 담는 사람들 사이에서 천홍츄는 혼자 도망쳤다. 무서워서 죽을 것만 같았다. 그 지폐가 전부 기준치를 넘는 방사능에 오염되었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아무튼 하청업체들은 제4원전이 결국 상업 운전까지는 가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대만전력의 예비 전력량이 상당히 웃도는 상태라, 제4원전이 없어도 전기는 전혀 부족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쓰지도 못할 원전이니 공사야 대충대충하면서 돈만 받아먹으면 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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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 원전 사고 D+647

 

 "즈즈가 태어난 뒤 이 문제를 다시 생각해봤어. 난 링팡이랑 생각이 같아. 즈즈는 이 세상이 필요하지 않아. 지금의 문명은 역사의 우연으로 창조됐지. 그건 흘러내리는 모래 위의 문명이고 그냥 우연히 나온 결과물일 뿐, 정확한 결과를 보장해주지 않아. 특히나 즈즈 같은 아이들에게 철저하게 잘못된 문명이라고. 그 아이가 어떻게 그런 사회에서 생존할 수 있겠어? 어떻게?"

 "우리는 이미 다 컸어." 샤오룽이 말을 이어갔다. "우린 수십 년의 시간을 들인 끝에 이 잘못된 문명에 의해 괴물로 키워졌지. 우린 이미 그런 존재지만 즈즈는 아무 잘못 없어."

 샤오룽이 잠시 멈췄다. 눈물이 그녀의 눈가에 어려 있었다. 그녀의 흐느낌이 흐르는 물소리에 사라졌다.

 "난 그 아이를 사랑해. 하지만… 그 아이 역시 괴물이야. 우리와는 다른 괴물이지. 오래전 인류의 잘못된 선택으로 문명은 무모하게 돌진하면서 비틀거리게 됐어. 대관람차와 살인마가 공존하는 세상에서 말이야. 어쩌면 당신이 전에 말한 대로 과도한 자신감과 낙관 탓이라고, 잘못은 인정하거나 중단할 용기가 없어서라고, 심지어는 이 모든 기괴한 모습이 아름다운 꿈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 그렇게 무작위로 일어난 실수가 결국은 무너져 내릴 구조체를 만들었고 기형을 만들어버렸다고. 즈즈도 그런 아이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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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 원전 사고 D+684

 

 "그건 정치적 의미를 만들어내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었습니다. 반드시 직접 현장에 가셔서 베이추이 댐이 이미 심각하게 오염되었음을 직접 발견하셔야 했습니다. 반드시 직접 하셔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대가는 다른 사람이 목숨으로 치렀고…."

 "다른 사람이 목숨으로 대가를 치렀습니다. 최소 수십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방사능 내부 피폭으로 대가를 치렀지요."

 남자가 말을 똑같이 되풀이했다.

 "하지만 정치적 의미는 모든 것을 넘어섭니다. 그 점을 명확히 아셔야 합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아무 표정이 없었다.

 "정치적 의미는 모든 것을, 다른 사람을, 방사능을 넘어섭니다. 심지어 어르신 자신도, 어르신의 생명도 넘어섭니다. 우리로서는 달리 선택지가 없었습니다."

 

 

 

... 당연한데 생각하지 못하는 문제들이 있다. 대만에 원전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못했다. 그렇게 지진이 심한, 작은 섬에? 하지만 심지어 최대 도시인 타이베이 근처에 이미 3기가 있었고, 4기째 가동될 뻔했다.

 

... 쓰여진 시점도, 내용도 놀라운 소설이었다. 놀라운데 또 너무 익숙해서 몸서리가 쳐졌다. 동북아시아는 왜 이런 것들만 공유하죠? 그리고 차라리 동북아시아만의 일이었으면 싶지만...

 

... 그래도 점점 대만 시민들의 행동력에 놀라게 된다. 외부에서 봐서 그런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