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를 문제로 만드는 사람들 - 희정

TheEnd 2023. 4. 3. 20:53

프롤로그 | 문제가 되지 못한 문제들

 

 이제 누구도 반도체 일터가 위험을 안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순 없다. 다만 기업은 그 위험을 과거의 일로 치부하고 싶어 했다. 반도체 생산라인은 자동화되어 유해물질을 뿜어내던 낡은 설비는 사라졌다고 했다. 그렇게 일단락된 줄 알았다. 당사자들은 질병과 장애를 지니고 살아가야 했지만, 그래도 사건은 역사 속으로 흘러가나 보다 했다.

 그러나 이 또한 안일한 믿음이었다. 끝난 것이 아니었다. 태아에게 그 영향이 전해졌을 때, '피해'는 다시 등장했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일하는 사람을 일회용품처럼 취급하지만, 유기적인 몸을 지닌 채 타인과 연결되어 살아가는 인간은 일회성 존재가 될 수 없었다. 피해마저 연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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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 목소리들

다른 대화 - "그럼 넌 내 마음을 아니?"

 

 나에게 온전히 의존하는 존재가 생긴다니. 상상만으로도 무겁다. 그런데 양육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또 아니란다. 그 연약한 의존성이 버겁다가도 어느새 보면 자기 힘으로 공갈 젖꼭지마저 뱉어내고 있단다. 오롯한 의존이란 것은 없다. 거부가 있고 보챔이 있고 요구가 있다. 그 요구는 부당하기도, 당연하기도 하다. 그러다가 어느 날엔 자신이 기댔던 어깨를 내주며 세상 무엇보다도 다정한 위로를 건네다가, 또다시 왜 내 마음을 몰라주냐 묻는다. 그게 자녀와의 관계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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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대화 - 한 사람 몫을 요구하는 세상에서

 

... 나는 궁금한 것이 생겼다. 왜 직업병 문제를 겪는 자녀들은 저리 선할까. 내가 본 이들은 그랬다.

 "생각해보면 엄마가 참 멋있는 것 같아요."

 동진씨는 삼성이라는 대기업에 맞서 산재 신청을 한 엄마가 대단하다고 했다. 나는 그 대단함에 동의하면서도 사람이 자기 꿋꿋함을 드러낼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주는 '곁'을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람이 병환(역경이건 불운이건 빈곤이건 사고건)을 겪으면서도 선함을 유지하는 힘은 잘 모르겠다. 다만 내가 아는 건 그들의 자녀가 유순한 마음으로 부모를 품어주지 않았다면, 부모들은 산채 신청이건 다른 무엇이건 시도해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힘들어서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을 것이다. 부양과 돌봄의 무게가 가볍진 않다. 그러나 그 책임이 너무 무겁지 않도록 서로가 서로를 돕고 이해하기에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유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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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선택지와 직업병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기에 어머니를 만들었다'는 말이 각광받는 사회에서 어머니들의 자리는 좁디좁았다. 몸가짐이 검열되는 자리이며, 헌신이 당연시되는 자리이며,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되는 자리이다('맘충'이라는 말을 생각해보자). 실수도 실패도 없어야 한다. 자신의 실패와 오점이 자녀의 몸과 마음에 새겨진다고 학습되는 자리이다. 그런 자리에서 아픈 자녀의 문제를 드러내는 것은 타인들 앞에서 '오점과 실패'를 펼쳐 보이는 일이다. 자녀의 '선천성 기형'은 물론, 배 속에서 아이가 사라지는 슬픈 일조차 말하기 어려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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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 무지와 증명

1. 무지의 이유

 

 회사를 믿었다. 믿었다는 말이 이들이 지닌 순수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하는 소리가 아니다. 믿는 일은 자연스러웠다. 사실, 일하는 이들은 의심할 필요가 없다. 애당초 의심을 해야 하는 주체는 물질을 사용하는 기업과 그 물질을 규제·관리감독할 책임이 있는 정부다. 그러니 '왜 몰랐냐'라는 질문의 답으로 가장 근접한 말은 '회사가 알려주지 않아서'이다.

 앞서 언급한 환경수첩은 외부 유출이 금지됐다. 그러나 이 환경수첩을 받지 못한 것은 외부인만이 아니었다. 회사에서 함께 일하는데도 환경수첩의 존재를 모르고 있는 직군이 있었다. 삼성반도체에서 근무하고 있던 수만 명의 오퍼레이터였다.

 

 일하는 사람은 알고도 몰랐을 수 있다. 몰라야 하기에 몰랐을 수도 있고, 진정 몰랐을 수도 있다. 기업은 모를 만한 사람을 뽑아 일을 시키고, 알아도 어찌할 수 없는 조건을 만들고, 알면서도 모른 척하도록 길들인다. 기업은 일하는 사람의 무지를 조장하는 수많은 장치를 가졌다. 장치는 작동했고, 사람들은 그 장치 위에서 성실히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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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평등하지 않기에 근거가 없는 거죠"

 

 한국 내부에서도 직업병 논란이 끝나지 않았다. 2세 질환이라는 새로운 문제도 등장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한국의 기업은 중국과 베트남 등지로 진출해 이번에는 국제적 가해자가 된다. 김명희는 이런 이중적 위치가 한국이라는 국가에 중요한 역할을 부여한다고 했다.

김명희: 유해물질 연구를 할 수 있는 자원이 있는 미국이나 유럽 같은 곳에선 더는 반도체 제조가 이뤄지지 않고 있으니 연구가 가능하지도 않고 그 필요를 느끼지도 않는 거죠. 반면 반도체 생산이 이뤄지고 있는 동유럽이나 동남아, 중국 등에서는 연구를 하기 어려운 상황인 거예요. 불균형이 생기는 거죠. 그나마 대만은 반도체 생산을 하면서 연구 기반도 있기에 적은 수의 논문이라도 나온 거고. 한국도 관련 연구를 할 수 있는 중간자적 위치예요. 한국과 대만이 반도체 직업병에 관한 조사와 연구를 제대로 하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근거가 없는 이유는 분명하다. 근거가 될 만한 '마땅한' 자료가 없으며, 말하는 사람이 없으며, 관련 연구의 지원이 없다. 국가가 나서서 근거를 만들어야 하지만, 하지 않았다.

 "평등하지 않기에 근거가 없는 거죠."

 근거를 가질 수 없는 집단을 만드는 것은 불평등을 유지하는 길이다. 그 사실을 잘 알기에 힘 있는 자들은 뒷짐 진 채 아픈 이들에게 근거를 내놓으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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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 목소리의 길목

2. "우리가 또 하나의 의미를 던졌구나"

 

 "간호사를 충원해야 한다는 인식 자체가 없었던 거 같아요."

 병원 운영을 좌우하는 관리자들은 대부분 사무직 남성이었다. 이들은 간호사 업무의 중요성도, 왜 적정한 인원이 필요한지도 납득하지 못했다. 그래서 임신부 간호사에게 야간노동을 강요할 정도로 사람이 부족한데도 신규 채용에 품을 들이지 않았다. '중하고' '긴한' 일을 하는 사람들도 아닌데 돈 들여 '또' 채용하는 것이 아까웠을까. 어차피 뽑아도 나간다고 했다(일은 많고 월급은 밀리니 당연한 일이다). 어떤 노동이 '주변화'되는 데는 그다지 논리적인 이유가 필요하지 않았다.

 제주의료원 사건을 분석한 한 법학자의 말은 이렇다.

 "노동시장에서 남성이 비해 상대적으로 소외되고 보호받지 못하는 여성 근로자가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일하는 동안 모(母)의 체내에 있었기 때문에 태아가 직업병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 제주의료원 사건의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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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 | 정상 일터의 사소한 비밀

1. 본 적 없는 사람들

 

 공동체 안에서 사람이 살아간다(성원권)는 말은 그의 생애주기에 맞춰 공동체의 제도와 지원이 존재함을 의미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사회가 소수자를 배척하는 방식은 '너희 존재는 없다' 같은 선언이 아니다. 또래 집단을 사귀고, 직장에 들어가고, 가족을 이루고, 자녀를 낳고, 나이 듦에 따라 변화하는 삶에 대한 지원을 멈추거나, 하지 않거나, 빼앗는 것이다. 동성결혼을 비법제화하는 일, 동성 커플에 대한 입양을 허가하지 않는 것, 법적 가족이 아닌 이의 수술 동의서를 거부하는 것이 여기에 속한다.

 어떻게 회사가 개인의 인생에 맞춰 지원을 할 수 있느냐는 반문도 있겠지만, '정형화'된 직장 대부분은 노동자의 생애주기를 고려해 임금과 복지를 설계했다. 대표적으로 호봉제(연공서열제)가 있다. 한국사회에서 완전고용에 대한 환상은 한 남성이 평생직장을 다니며, 아내와 자식으로 구성된 소규모 가정을 꾸려나가는 '가장'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는 계획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때 가장이 아닌 여성의 생애주기는 계획을 세우는 데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여성이 결혼과 임신을 하면 직장을 떠나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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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임신이 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임신 노동자가 일하는 것을 금지하는 업종과 업무를 다른 국가(소위 선진국)들과 비교하고 있을 때였다. 독일 모성보호법을 살피다가, 이 조항에서 멈췄다. 제11조 '임신 여성에 대한 금지 업무' 중 6항. 보는데 생각이 많아졌다.

 

사업주는 임신 여성을 다음의 작업을 수행하게 해서는 안 된다.

 1. 성과급 업무 또는 작업 속도를 높임으로써 보다 많은 임금을 받을 수 있는 기타 업무.

 2. 일정한 작업 속도의 컨베이어벨트 업무.

 3. 주어진 노동 템포에 속도를 맞추는 작업.

 

 

... 제주의료원 사건에 관해서는 어느정도 알고 있었고 반도체 산업의 2세 질환 문제도 접한 적이 있었다. 관련된 역사를 꿰어가고 여성의 노동과 모성 보호까지 이해를 넓혀가는 구성이 훌륭했다. 덕분에 2세 질환이라는 '문제'가 '문제'가 된 흐름까지 파악할 수 있었다.

 

... 필자 소개에서 '기록노동자'라고 스스로를 소개하지만, 희정 님이 해낸 일은 '기록' 이상의 작업이라는 생각이 든다. 구성부터 문장 하나하나까지 최선을 다해서 끝까지 이해해보려는 노력이 보여서 내내 감탄하며 읽었고, 소위 '연구를 한다'는 사람으로서 부끄럽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