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 - 주디스 허먼

TheEnd 2023. 3. 13. 19:44

1부 외상 장애

1. 망각된 역사

 

 가해자를 편들기는 너무나 쉽다. 가해자는 국외자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가해자는 악을 보고 싶어 하지 않고, 듣고 싶어 하지 않고,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보편적인 바람을 악용한다. 반대로 피해자는 국외자가 고통을 덜어 주기를 원한다. 피해자는 행동하고 관여하고 기억하기를 요구한다. ...

 범죄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해자는 망각을 조장한다. 가해자는 할 수 있는 것이란 다 한다. 은폐와 침묵이야말로 가해자의 첫 번째 방어책이다. 은폐에 성공하지 못하면 가해자는 피해자의 신뢰성을 공격한다. 그녀를 완전히 침묵시킬 수 없다면 그는 아무도 그녀의 말을 들을 수 없도록 만든다. ...

 

 그러나 <히스테리아의 원인론>의 출판은 이 연구에 끝을 맺게 하고 말았다. 1년이 채 지나지도 않아서, 프로이트는 히스테리아의 기원에 놓인 외상 이론을 비공식적으로 거부하였다. 프로이트의 대응은 그의 가설이 담고 있는 급진적인 사회적 함의에 스스로 계속 불편해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히스테리아는 여성에게 너무 흔한 것이었고, 만약 그의 환자들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그리고 그의 이론이 정확하다면, "아동에 대한 도착 행위"라고 말한 것은 만연해 있는 무엇이 되어 버린다. ...

 딜레마에 빠진 프로이트는 여성 환자에게 귀 기울이기를 그만두었다. ...

 

 히스테리아의 외상 이론이라는 잔해 위에서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을 창설하였다. 다음 세기를 지배하게 된 심리학 이론은 여성의 현실에 대한 부정을 기반으로 세워졌다. 성은 연구의 주요 중심점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성적 관계가 실제로 발생하는 착취적인 사회적 맥락은 완전히 감추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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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공포

 

 외상 반응은 행동이 더 이상 효과적이지 못할 때 발생한다. 저항이나 탈출이 불가능해질 때 인간의 자기 방어 체계는 압도당하고 와해된다. ... 외상 사건은 생리적 각성, 정서, 인지, 그리고 기억 속에 뿌리 깊고 지속적인 변화를 발생시킨다. 더 나아가, 외상 사건은 건강하게 통합됐던 기능들을 뿔뿔이 잘라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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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단절

 

 사람들은 보통 관계적인 삶에 대한 손상은 외상의 부수적인 결과라고 생각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외상 사건은 자기라는 심리적 구조뿐만 아니라 개인과 공동체를 연결하는 애착과 의미의 체계에도 주요한 영향을 미친다. ... 외상 사건은 세상이 안전하고, 자기는 가치 있으며, 세계 질서에는 의미가 있다는, 피해자가 가지고 있었던 기본적인 가정들을 파괴한다. ...

 

... 강간의 핵심은 사람에 대한 신체적, 심리적, 그리고 도덕적 침해에 놓여 있다. 침해violation는 사실상 강간과 같은 말이다. 강간범의 목적은 피해자를 공포에 떨게 하고, 지배하고, 모욕하며, 완전히 무력하게 만드는 데 있다. 그러므로 강간은 그 특성상 심리적인 외상을 불러일으키려는 의도적인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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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속박

 

... 가해자는 자신을 이해하려는 사람들 앞에서 오만하기 때문에, 연구 대상이 되기를 자청하지 않는다. 가해자는 자신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지각하기 때문에, 법적인 문제가 없는 한에는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다. 가장 일관적으로 나타나는 가해자의 특징이라면, 피해자의 증언과 심리학자의 관찰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그가 외관상으로 멀쩡하다는 점에 있다. 정신 병리학의 일반적인 개념은 가해자를 정의하고 파악하는 데 실패했다.

 

 다른 이를 압제하는 기법들은 심리적 외상이라는 체계적이고 반복적인 시련을 기반으로 확립된다. 이것이 바로 피해자의 힘을 빼앗고, 피해자를 단절시키는 조직적인 기법이다. 이러한 심리적 통제는 피해자에게 공포와 무력감을 주입시키고,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피해자의 자기감을 파괴시킨다.

 

 지속된 속박은 모든 종류의 인간관계를 방해하며 외상의 변증법을 증폭시킨다. 생존자는 강렬한 애착과 겁에 질린 회피의 양 극단 사이에서 동요한다. 그녀에게 관계에 다가가는 것이란 마치 삶과 죽음의 문제와도 같다. 그녀는 구조자로 보이는 사람에게 절박하게 매달리고, 동맹자로 보이는 이에게는 헌신적인 태도를 보이고, 무관심한 방관자로 보이는 이에게는 분노와 경멸을 드러낸다. 그녀 안에는 다른 이에 대한 어떠한 내적 표상도 안정되어 있지 않으므로, 그녀는 다른 사람이 작은 실수를 저지르거나 조금만 실망스럽게 해도 그의 역할을 급작스럽게 바꾸어 버린다. 어찌할 수 없게도, 실수를 위한 공간은 없다. 시간이 지나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뢰를 측정하는 생존자의 가혹한 시험에 통과하지 못하게 되고, 따라서 생존자는 관계를 피하게 된다. 그녀의 고립은 자유로워진 이후에도 지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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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아동 학대

 

 아동기 학대라는 병리적 환경 속에서 아이는 건설적이면서도 파괴적인, 아이답지 않은 능력을 발달시킬 것을 강요받는다. 아이는 신체와 정신, 현실과 상상, 지식과 기억의 일상적 관계가 더 이상 유지되지 않는 이상(異狀) 상태의 의식을 발달시키게 된다. 이러한 의식의 변형은 일련의 막대한 신체적인 증상과 심리적인 증상을 만들어낸다. 증상은 기원을 감추는 동시에 드러낸다. 증상은 말로 하기에는 너무나 끔찍한 비밀을 위장된 언어로 전한다.

 

 매일같이 적의, 무기력, 무관심의 단서를 마주하면서, 학대받은 아이는 부모와의 초기 애착을 지킨다는 근본적인 목적 앞에 모든 심리적 적응 능력을 바친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아이는 다양한 심리적 방어에 의존한다. 이러한 방어의 덕으로, 학대는 실제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의식적 자각과 기억에서 단절되거나, 어떤 일이 일어났던지 간에 그것이 실은 학대가 아니었다고 축소되고, 합리화되고, 면죄된다. 있는 그대로의 견딜 수 없는 현실에서 탈출할 수도, 현실을 변형시킬 수도 없는 까닭에, 아이는 정신을 변형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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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새로운 진단 기준

 

... 이들은 기본적인 생존에만 몰두해야 하는 삶을 살았던 피해자의 임상적 상(像)이 사건 이전에 피해자가 가지고 있었던 기저의 성격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여전히 오해하고 있다. 공포가 지속하는 상황에서 발생하는 성격의 부식(腐蝕)에 대한 어떠한 이해도 없이, 보통의 상황에 적용될 만한 성격 조직의 개념이 피해자에게 적용된다. 따라서 만성적인 외상의 복잡한 후유증을 성격 장애라고 잘못 진단할 위험이 농후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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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회복 단계

7. 치유 관계

 

 외상 경험은 사람을 믿을 수 있게 해주는 능력을 파괴시켰기 때문에, 환자는 치료자의 능력과 완전함에 절박하게 기대려 하지만 또한 그리할 수 없다. 다른 치료 관계라면 처음부터 어느 정도 믿음이 다져져 있다고 가정되지만, 외상을 경험한 환자를 치료하는 데 이 가정은 결코 보장될 수 없는 것이다. 환자는 모든 종류의 의심과 혐의의 희생물이 된 채 의료 관계로 들어선다. ...

 

 견딜 수 없는 무력감을 방어하기 위해 치료자는 구조자의 역할을 맡으려 할 수 있다. 치료자는 점차 환자의 변호인 역할을 맡으려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환자가 스스로 행동할 능력이 없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환자는 무력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치료자가 받아들이게 되면, 외상성 전이는 영속되고 환자는 더욱 무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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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안전

 

 회복은 세 단계를 거쳐 완결된다. 첫 번째 단계에서 생존자는 안전을 확립한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기억하고 애도한다. 세 번째 단계에서는 일상과 다시 연결되어 간다. ...

 

 ... 아는 것은 힘이 된다. 외상을 경험한 사람은 자신의 상태를 명명할 수 있는 진정한 상태를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나아질 수 있다. 진단을 확인하면서 환자는 숙달 과정을 시작할 수 있다. 무언의 외상에 더 이상 구속되지 않은 채, 그녀는 자신의 경험을 위한 언어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녀는 혼자가 아님을 알게 된다. 다른 이들 또한 자신과 같은 방식으로 고통받아 온 것이다. 더 나아가, 미쳐 버린 것도 아님을 알게 된다. 외상 증후군은 극단적인 상황에 처한 인간이 보일 수 있는 일반적인 반응이다. 마침내 그녀는 이러한 상태로 영영 고통받을 운명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치유를 기대할 수 있다. 다른 이들이 치유되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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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기억과 애도

 

 환자와 치료자 모두 외상이라는 악마를 추방시킬 수 있는 마술적인 변화를 소망하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심리 치료는 외상을 제거하지 않는다. 외상 이야기를 되짚는 목적은 외상을 통합하는 데 있으며, 외상을 내쫓는 엑소시즘에 있지 않다.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외상 이야기는 전환을 거치지만, 이는 보다 현재적이고 현실적이 되고자 하는 목적에서이다. 심리 치료의 근간에 놓인 기본 전제는 진실을 말할 때 회복의 힘이 생긴다는 믿음에 있다.

 

... 비탄을 포함하여, 정서를 완전하게 느끼는 것이 가해자에게 복종하게 된 것이라 할 수는 없다. 이것은 저항의 행동이다. 상실했던 모든 것을 애도하면서 환자는 파괴되지 않은 채 살아남은 내면의 삶을 찾아낼 수 있다. ...

 

 외상은 절대로 완전히 재구성되지 않는다. 인생의 새로운 단계마다 발생하는 새로운 갈등과 도전이 피할 틈 없이 외상을 깨울 것이며, 경험의 새로운 측면을 일깨워 줄 것이다. 그러나 환자는 자신의 역사를 재생하고, 인생을 살아가는 데 새로운 희망과 힘을 느끼게 되었다. 이로써 두 번째 단계는 달성되었다. 또다시 시간은 흘러간다. '이야기하는 행동'이 결론에 다다랐을 때, 외상 경험은 진정한 과거가 된다. 이 시점에서 생존자는 현재의 삶을 일으켜 세우고, 미래의 열망을 추구하는 과제와 마주하게 된다.

 

 

 

... 독서모임에서 읽은 책. 사실 책 내용보다 독서모임에서 오간 이야기가 더 인상적으로 남아 있다. 평범한 사람들은 트라우마를 가진 사람을 이해해주기 어렵다고 했더니, 당사자성을 가진 분이 정상인과는 관계를 맺지 말라는 뜻으로 들린다고 지적했다.

 

... 하지만 소위 정상인들끼리도 관계를 맺기 어려운 세상에서 과연... 인간을 그 정도로 믿을 수는 없다.

 

... 악인들... 악인들을 알아내야 하는데.

 

... 그리고 망각된 역사 부분도 흥미로웠다. 어쩔 수 없이 사회과학은 취사선택의 측면도 있다는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