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곤 과정 - 조문영
1장 고인 가난
... 북유럽의 사회 보장이 조세 부담을 높이면서 전 인구를 수혜자로 삼은 것과 달리, 한국의 자산 기반 복지는 저축과 소득공제를 실질적 복지 수단으로 삼은 까닭에 수혜 집단이 중산층과 고소득층에 집중되었다. 서구의 사회보장이 제도 시행 과정에서 먼저 포용했던 빈곤층과 노동계급은 한국의 사회보험제도에서는 거의 배제되었다. ... 해방, 전쟁, 분단, 군사쿠데타를 거치면서 노동계급은 "(서구와 달리) 포섭적 복지 전략의 대상이 아닌 반복지적 억압 전략의 대상"일 뿐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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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의존의 문제화
... 복지가 직업화·제도화·산업화를 거치며 '성장한' 역사란, 뒤집어보자면 사회복지 체제 구축에 관여해온 종사자들이 가난한 사람들한테 '의존해온' 역사다. 그룹홈의 부모가 영재한테 의존하면서도 그에게 낙인을 씌우듯, 복지 종사자들 역시 빈자에게 기대는 동시에 그들에 대한 심판자를 자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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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노동의 무게
... 자원봉사는 "관계라는 가치를 생산하고 축적"한다는 점에서 자원노동volunteer labor이기도 한데, 쭤메이를 포함해 센터에서 내가 만난 많은 청년들은 공장노동보다 자원노동에서 가치, 지식, 관계를 '생산'하는 즐거움을 찾았다. 공장노동과 서비스노동, 물질노동과 비물질노동, 작업장의 규율 노동과 미디어 테크놀로지를 통해 확대된 삶 정치적 노동이 혼재된 세계에서 어떤 '노동'과 '노동자'가 우리 앞에 당도했나를 진지하게 물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하트와 네그리가 강조했듯, "어떤 실천이 노동을 구성하는가는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도, 고정된 것도 아니다. 노동의 정의 자체가 사회 논쟁의 유동적인 장소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쭤메이를 폭스콘 노동자의 전형으로 묶어내는 대신 그가 폭스콘 공장 너머 사회적 공장에서 생산하는 다양한 물적·정동적 가치에 주목했다. 강조할 것은, 생산이 전 사회에서 발생할 때, 착취뿐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이 틈입할 여지도 커진다는 점이다. '공통적인 것', 즉 "언어와 정동, 네트워크를 발산하고 공유함으로써 얻게 되는 기쁨"을 가질 기회는 가난한 사람들한테 전적으로 닫혀 있지 않다. ... 하지만 이 장의 문화기술지가 보여주듯, '사회적 공장'은 노동자들을 단순히 기계, 노예, 짐승으로 억압하는 대신 이들의 열망을 한껏 부추기는 방식으로 가치를 수탈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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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집으로 가는 길
... 중국 당-국가는 도시 중화학공업을 생산력 발전의 핵심 동력으로 삼고, (서구처럼) 자국 바깥으로 눈을 돌리기보다 그 내부의 농촌을 부를 전유하고 자국 경제의 모순을 전가할 식민지로 삼았다. 이렇게 도시민과 농민을 사회적 신분으로 위계화한 역사는 국가와 인민의 관계를 차별과 혐오의 풍경에 틈입시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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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빈곤 전염의 공포
... 나는 빈곤 문화의 신자유주의적 생산에 주목하는데, 이는 "위기가 반복되는 신자유주의 흐름에서 하향 이동이나 삶의 격동을 경험하는 시타의 한국인 이주자들이 자신의 '정상성'을 증명하고, 스스로를 '찌질이' '루저'와 구분 짓기 위해 자의적인 빈곤 문화의 표식arbitraty cultural markers of poverty을 동원하고 (재)생산하는 과정"을 일컫는다. ... 초국적 연결이 급증한 시대, 나락에 떨어질지 모른다는 불안이 빈곤 감각을 증폭시키는 시대에 빈곤·복지·노동 담론이 서로 맞물리면서 '빈민'을 조립했던 문화 정치가 국민국가의 경계를 넘어 (이주자, 난민 등) 정치적·경제적으로 취약한 지위에 놓인 다양한 범주의 사람들을 겨냥하는 낙인, 열악한 사람들이 서로를 구별 짓는 표식을 전방위적으로 확산해내는 것이다. 정상과 비정상은 특정 개인의 상태가 아닌 관점에 불과하지만, 빈곤 전염의 공포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관점을 인격화하는 데 몰입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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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말할 수 있는 프레카리아트
... 무릇 정체성이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형성 중인 관계의 다발이어서 이마저도 상황에 따라 가변적이지만, 어떤 경우든,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어떤 무리가 "안전할 권리를 외치는 '우리' 바깥에 머무는 한, '그들'은 '우리'의 안전을 위협하는 존재로 언제든 출몰할 수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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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인류세의 빈곤
...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적어도 한국 사회 활동가들이 보여준 '동거同居' 만큼은 논의의 규모가 달라지더라도 우리가 품어야 할 윤리가 아닐까 한다. 자활과 자립을 섣불리 강요하는 정부 정책은 낡고 병든 몸이 일정한 프로그램을 거쳐 '건강한' 몸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발전의 꿈에 머물러 있지만, 오랫동안 가난한 사람들과 동거해온 활동가들은 다른 꿈을 꿨다. 이들의 회복력이 더딜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하고, 당장에 거창한 반전을 바라기보다 별 볼 일 없는 일상을 함께 견디며, 그럼에도 누구든 지금보다 더 나은 세계-내-자리를 확보할 자격이 있음을 서로 배우고, 이 느린 시간을 거쳐 가난한 주민이 제 권리를 "스스로 말하는" 세상을 바랐다. ...
... 본문 내 인용은 모두 생략했다.
... 빈곤을 다양한 환경, 다양한 세대에서 살펴보는 것이 좋았고, 빈곤 및 노동과 관련해서 생각해 볼 만한 지점이 많았다. 빈곤과 복지를 함께 이야기하는 것도 좋았다. 특히 저자가 대학에서 만난 청년들의 사례는, 흔히 접하기 어려운 내용이라 흥미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