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란스러운 동거 - 박은영

TheEnd 2022. 10. 10. 22:17

들어가며 | 질문을 바꿔 보겠습니다

 

 쏟아지는 질문 세례에 적절한 답을 찾지 못해 헤매던 내게, 동료 장애인들은 무례한 사람에겐 대답보다 질문을 던져야 함을 알려 주었다. 정말이지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정상' 범주에 속한 사람들만이 질문할 권리를 독점해 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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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다른 몸의 골목쟁이

4. 학교 | 무성한 숲길을 헤쳐 나가는 법

 

... 찬찬히 생각해 보면, 내가 경험하는 부정적 상황이나 관계 문제의 원인이 오로지 내 장애 때문이기만 한 적은 거의 없었다. 친구와 멀어질 수 있는 이유는 수백 가지였다. 남들과 다른 내 몸을 친구들이 낯설어해서, 내가 말실수를 해서, 공기놀이를 못해서, 관심사가 달라서, 우리 집에 친구를 데리고 갈 수 없어서 등.

 친구들과 결코 쉽지만은 않은 관계를 이어 나가면서, 나는 '장애 때문'이라는 말은 100퍼센트 진실 혹은 100퍼센트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그것만은 잊지 않으려 했다. 실제로 이 원리는 나를 지키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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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좌충우돌하며 평범하게

8. 차별 | 매뉴얼 없이 살아남기

 

 삶에서 어떤 종류의 폭력을 겪고 난 사람들은 수동적인 피해자로만 낙인찍지 않기 위해 '생존자'라는 표현을 사용하곤 한다. 어쨌든 살아남아 이 글을 쓰고 있으니 나도 생존자로 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이 살아남음의 경험은 '그때도 안 죽었는데, 이까짓 거야, 뭐'라는 일종의 자신감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가끔 자문하게 된다.

 '과연 나의 무엇이 살아남은 걸까?'

 

 적어도 당시의 선생님들과 친구들도 갈피를 못 잡아 헤매기는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모두 처음 서로를 만났고 함께 처음 가 보는 동굴에 들어갔는데, 그 누구도 우리 손에 개략적인 지도 하나 쥐여 주지 않았다. 모두가 다니는 학교이니 장애학생이 입학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고, 인생 경험이 적고 관계에 서툰 사춘기 학생들과 처음 장애학생을 만난 교사들이 상처를 주고받는 일도 예상하기 어렵지 않건만, 어디에도 우리를 위한 매뉴얼 하나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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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신앙 | 그와 함께 만드는 이야기

 

 나는 고통을 이용해 나를 조종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 내 상황 속으로 깊숙이 들어오셔서 피 흘리고 슬퍼하시는 하나님의 고통을 통해 그분을 더 깊이 알아 갔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분의 특별한 사랑을 느끼게 하기 위해 장애를 주셨다는 말은 내 몸과 삶에 대한 모욕이다. 그 말은 또한 장애인을 차별하는 인간의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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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 잘 아플 권리를 위하여

19. 의료 | 서로 돌보는 동료 시민

 

 책상과 의자의 형태, 업무 방식과 강도 등 비장애인에게 맞춰진 일상의 다양한 요소들은 표준에 부합하지 않는 나의 몸에 손상이나 통증을 유발한다. 그렇게 쌓이고 쌓여 한순간 폭발하는 통증은 일상을 통째로 집어삼킨다. 일상이 만들어 내는 무지막지한 통증으로부터 일상을 지키기 위해 병원으로 달려가면, 의료진은 이 방법 저 방법으로 통증을 달래준다. 하지만 바뀌지 않는 나의 일상은 그들의 수고를 금방 무력화시킨다. ...

 

 재활병원 사람들은 '극복'이나 '치료' 따위는 없는 뫼비우스의 띠 위를 한없이 걷는 기분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듯하다. 장애인이나 만성질환자의 몸은 치료사나 의사가 영웅이 되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방해하지만, 그들은 매번 실패할 치료를 묵묵히 수행한다. 환자도 의료진도 지독한 반복 속에 허무주의에 빠지는 대신, 그 반복 위에서 일상을 꽃피우는 서로의 아름다움을 보는 법을 익혀 간다. 진이 빠지는 가파른 뫼비우스의 띠 위에서 서로를 탈출시킬 수는 없지만, 그 위에서 걷는 법을 서로에게 보여 준다. 때로는 느리게, 때로는 울면서, 때로는 신나게, 독특하게 한 발 한 발 삶을 만들어 갈 수 있다는 확신을 성실하고 무던한 삶으로 재확인해 준다.

 

 

 

.... 조한진희 작가의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와 겹치는 소재가 많지만(실제로도 조한진희 작가와도 인연이 있다) 훨씬 더 압축적으로 정리된 느낌이었다.

 

... 장애 당사자의 체험 중 중학교에서 겪은 에피소드가 인상적이었다. 준비가 전혀 되지 않은 학교와 교사들, 그들이 만들어내는 불편한 분위기에 휩쓸리는 아이들... 그리고 재활병원 에피소드도. 더 큰 구조를 볼 수 있을 때까지, 충분히 사유하고 소화되어 나온 글이라는 느낌이다.

 

... 신앙에 대한 부분도 나는 생각도 해보지 못한 영역이라 신선했다. 장애신학도 흥미로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