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 조한진희
1장 아픈 몸이 된다는 것
나도 내 몸이 낯설다
질병을 경험한다는 것은 몸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한다는 일이다. 누군가 질병에 걸린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물어온 적이 있다. 나는 어항 속에 돌 하나 더 얹어지는 것이 아니라 핏물 한 컵에 부어지면서 그 물의 밀도가 변하고 그에 따라 생탸계가 바뀌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저 질병 하나가 내 삶에 쏙 들어오는 게 아니라고 말이다. 이는 일상이 완전히 재구성된다는 뜻이며, 동시에 내가 기획한 미래가 무효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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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시간이 없을까
결국 아픈 사람은 최소한 세 가지 빈곤을 겪는다. 첫 번째가 앞서 말한 시간 빈곤이다. 시간 빈곤은 삶의 주체성을 적극적으로 감소시킨다. 두 번째는 누구나 알고 있듯 경제 빈곤이다. 아파서 일할 수 없는데, 아프기 때문에 의료비는 물론 생활 관리에 더 많은 비용이 드는 악순환이 발생한다. 그래서 질병은 더 낮은 빈곤층으로 내려가는 가장 가파른 미끄럼틀이다. 세 번째는 관계 빈곤이다. 체력의 한계 때문에 다양한 이들과 사회적 관계를 맺을 에너지와 시간이 부족하다. 게다가 아픈 몸에 대한 무지가 가득한 세상에서 자신을 설명해야 하는 피로감, 그리고 설명할 언어의 부재 때문에 만남을 회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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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소리는 사양합니다
어떤 면에서 이 사회가 아픈 이들을 대하는 방식은 여성을 대하는 방식과 약간 닮았다. 우선 '나는 알고 너는 모른다'는 전제 아래 시도 때도 없이 가르치려 다는 '맨스플레인mansplain'과 비슷하다. 두 번째는 부적절한 상황에 문제 제기를 하면 성찰하거나 사과로 답하는 게 아니라 '네가 예민한 거'라고 충고하거나 근엄하게 공격하는 모습이다. 세 번째는 만날 때마다 살이 쪘다거나 빠졌다, 혹은 예뼈졌다거나 안 예뻐졌다는 말로 평가하며 사회가 외모를 공동 관리하려는 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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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아픈 몸의 사회
더 위태로운 사람들
그런 의미에서 '건강 불평등' 문제는 가난하거나 차별받는 사람이 더 많이 아프고 삶이 더 불안정하다는 의미만은 아니다. 아프다는 것은 개인의 삶의 질이 떨어질 뿐 아니라 적극적인 사회 참여가 제한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 건강은 사회 활동에 참여하고 적극적으로 발언할 기회를 갖는 데 중요한 조건이다. 사회 구성원이 평등하게 건강권을 누릴 수 있을 때 비로소 평등한 사회 참여 또한 시작될 수 있다. 더 나아가, 건강하지 않은 사람도 온전한 사회 참여가 가능한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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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연광고, 어디까지 갈 거니
아픈 이들은 '질병에 대한 느낌'이 곧 '몸에 대한 느낌'이 될 때도 있다. 그 느낌을 어떻게 조절해나가느냐가 삶의 질을 좌우하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질병에 대해 만연해 있는 어둡고 음습하며 무서운 이미지를 사회적 차원에서 개선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 적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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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주치의가 있다면
... 왜 아픈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은 몸이 아파도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뜻이고, 이는 곧 자기 몸에 대한 통제권이 전혀 없는 듯 느껴지게 하기 때문이다. 즉, 질병은 세포에만 머무는 게 아니라 환자의 삶을 흔들며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 내과 의사의 행위는 단순히 환자에게 매우 친절히 몸 상태를 설명해준 것에 그치지 않는다. 환자가 몸에 대한 주체성을 잃지 않도록 사려 깊게 안내해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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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잘 아프기 위해 필요한 것들
안부에 답하는 법
아픈 사람이 자신이 경험하는 세계를 설명하는 건 필수적이다. 아프다는 것은 자신이 지금껏 사용해온 삶의 지도가 쓸모없어지고, 낯선 세계에 놓이는 일이다. 몸이 구사하는 새로운 언어를 배우며 적응해나가는 과정이다. 자신이 살아가게 된 새로운 세계에 대해 자신과 타인에게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면 쉽게 자책감에 빠지거나 오해가 생긴다. 결국 사회적 고립감을 느끼기 쉽다.
아픈 이와 관계 맺는 이에게도 그 세계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자신에게 익숙했던 그가, 아프면서 낯선 모습을 보인다. 그를 잃고 싶지 않다면 변화된 그 모습에 새롭게 적응해야 한다. ...
... 세상에는 아픈 몸에 대한 무지, 재단, 의구심이 만연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아픈 몸만 그런 것은 아니다. 소수자의 몸은 다 그렇다. 늘 설명하고 증명해야 한다. 설명이 필요 없다면 이미 소수자에 속하지도 않는다. 남성, 비장애인, 건강한 몸과 달리 여성, 장애인, 아픈 몸은 늘 설명을 필요로 한다.
... 독서모임에서 읽은 책. 제목에서 기대한 내용과는 어느정도 차이가 있었다는 데 모두 동의. 매체에 연재했던 칼럼을 모은 책이라 책 한 권으로서의 구성과 구색은 좀 아쉬웠다.
... 질병에 관해서는 90년대 생 작가들의 글을 주로 접해왔는데 확실히 차이가 느껴졌다. 전자가 개인에서 사회로 뻗어나가면, 이 책은 사회에서 개인으로 들여다 보는 느낌이랄까. 와중에 개인과 사회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느낌도 있어서 혼란스러운 부분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