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학의 도전 - 김도현
1부 접속
1장 장애학, 지금 여기의 콜라보 미션
2. 장애학이란 어떤 학문인가
... 사회적 모델론자들이 ' disabled people'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 그것은 'disabling society'를 염두에 둔 것이고, 따라서 연구의 초점은 '장애인'이 아니라 장애인이 무언가를 할 수 없도록 만드는 '사회'에 맞춰진다. 문제의 원인이 장애인의 몸(손상)이 아닌 사회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
... 해방적 연구 접근법을 주제로 매우 다양한 지점들이 논의되지만, 그 기저에는 크게 다음의 두 가지 문제의식이 놓여 있다.
첫째, ... 과학적 연구를 수행하는 연구자는 누군가의 편을 들거나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서는 안 된다고, 즉 '불편부당'해야 한다고 간주된다. 그러나 장애학에서 주창하는 해방적 연구 접근법은 연구자의 객관성과 중립성을 기각하고, 오히려 '편파성'과 '당파성'을 대놓고 주장한다. 즉 해방적 장애 연구는 '불편不偏'하지도 '부당不黨'하지도 않으며, 억압받는 자와 장애인의 편에 서 있다. ...
둘째, 학문을 하는 것도 하나의 활동이다. ... 해방적 장애 연구에서 장애인 대중과 장애학자는 이처럼 콜라보 미션을 수행하는 콜라보레이터collaborator, 즉 공동작업자들이다. 다시 말해 장애인 대중과 장애학자는 수평적인 관계 속에서 장애인 차별 철폐 내지 장애해방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향해 함께 소통하고 논의하고 연구하고 실천하는 관계다. 안토니오 그람시의 용어를 빌리면 장애학자는 장애인 대중의 일부로서 존재하는 유기적 지식인organic intellectual일 뿐이며, 장애학에서의 장애 연구는 연구의 결과물이 장애해방에 도움이 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연구 과정 자체도 장애인 대중에게 (억압적이지 않고) 해방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그것을 목적의식적으로 지향해야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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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손상'은 어떻게 '장애'가 되는가
2. 차별받기 때문에 장애인이 된다
... '손상은 손상일 뿐이다. 특정한 관계 속에서만 손상은 장애가 된다.' 이때 특정한 관계란 다름 아닌 '차별적'이고 '억압적'인 관계이며,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장애인은 '장애인이기 때문에 차별받는 것이 아니라, 차별받기 때문에 장애인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니까 손상을 지닌 무능력한 사람이어서 차별받는 것이 아니라, 차별받기 때문에 무언가를 할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곰곰이 궁리하던 와중, 나는 여성 문제라는 말이 무언가의 줄임말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즉 여성 문제를 '남성과 여성 간 관계의 문제'의 줄임말로 이해할 수 있다. ... 여기서 핵심은 바로 '관계'라는 단어에 있다. 관계에는 언제나 양방이 존재한다. ... 요컨대 여성 문제가 남성과 여성을 포함하는 우리 모두의 문제인 것은 이처럼 남성이 여성 문제의 한 축이기 때문이며, 여성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직접적으로 연관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 여성 문제와 같은 맥락에서 장애 문제는 '장애인과 비장애인 간 관계의 문제'이다. ... 장애 문제가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포함한 우리 모두의 문제인 것은 단지 장애인이 좋으면 비장애인도 좋고, 비장애인도 언제든지 장애인이 될 수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비장애인이 장애 문제의 한 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며, 장애 문제의 해결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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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성찰
3장 우생학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다
1. 20세기 전반기를 휩쓴 우생학의 실체
요컨대 흔히 다윈은 경쟁에 의한 선택(도태)의 논리를 자연의 세계에만 적용시킨 것으로 간주되고, 사회적 다윈주의의 시조인 스펜서가 이를 인간 사회로까지 확대시켰다고 이야기되지만, 이와 같은 평가에는 역설적인 측면이 존재한다. 경쟁과 도태의 논리는 당시 사회의 시대정신이었고, 다윈이 사회의 이런 논리를 자연의 세계에 투사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
2. 우생학, 새로운 간판을 내걸다
... 전후 우생학과 유전학은 진화론적 어법으로 말해 공진화共進化를 거듭해왔으며, 그 기본적인 관점과 이데올로기를 점차 인류유전학과 의료유전학으로 이전시켰다. 나아가 현대의 유전학은 더 이상 국가의 억압적 통제와 인구정책이 아니라, 유전 상담genetic counselling을 통한 '개인의 자발적 선택'이라는 차원에서 우생주의적 시스템을 가동할 수 있는 역량을 획득하게 된다. 신자유주의적 경쟁 문화의 전면화와 생명공학 산업의 발흥이라는 사회적 조건이 이런 역량을 더욱 강화해온 것은 물론이다.
... 어떤 선택이 진정 자유로운 선택이 되기 위해서는 그 반대편을 선택하는 것을 가로막는 사회적 압력이 충분히 제거되어야, 다시 말해 반대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역량이 사회적으로 부여되어야 하지만, 자발적 단종수술이나 시설 입소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산전 검사 및 선별적 낙태의 문제에는 이런 조건이 형성되어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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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우생학 파는 사회: 뒷문으로 이루어지는 우생학
이처럼 '예외상태에 놓인 벌거벗은 생명'으로서의 호모 사케르라는 형상을 우리는 바로 산전 검사와 선별적 낙태의 대상이 되는 장애를 지닌 태아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장애를 지닌 태아가 우리 사회에서 '살 가치가 없는 생명'으로 간주되고 임의적인 폭력 앞에 노출되어왔다는 점에서 그러하며, 낙태와 관련된 법에서 장애가 말 그대로 예외적 조건으로 취급되어 왔다는 점에서 또한 그러하다. ...
... 신자유주의란 시장과 사회 전반에 인위적인 경쟁을 구축하기 위해 법과 제도를 통해 개입하는 '적극적 자유주의'이자 '개입적 자유주의'이며, '사회 따위는 없다"는 관점하에서 사회적이고 공적인 것을 해체한 후 시장 질서와 경쟁의 원리를 일상의 수준으로까지 확산함으로써 사회를 통치하는 통치 기법이다.
우생주의적 욕망이 내면화되는 과정에는 무엇보다도 무한 경쟁의 체제에서 도태된 주체들을 '사회적 배재'의 영역으로 밀어내 "죽게 내버려"지도록 만드는 현실이 존재한다. ... 장애 대중을 포함한 한국 사회의 빈곤계층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자살-즉 죽음의 자발적 선택-을 우리가 사회적 타살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제도적으로 금지"당한 결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사회에서 우생주의에 대한 저항은 서로 연동하는 다음의 두 가지 차원에서 모색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주체의 측면에서는 신자유주의적 통치권력과 우생주의적 욕망에 대한 예속화assujettissement에서 벗어난 주체화subjectivation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확장하려는 시도가 있을 수 있다. ...
둘째, 사회구조적 측면에서는 저항권의 발동을 통해 사회적 배제의 메커니즘을 약화시키고 해체하려는 시도가 있을 수 있다. ... 그 구체적인 방식이 무엇이든 간에, 무조건적인 삶의 권리는 인민에게 주어진 최종심급에서의 권리, 즉 저항권이 활성화될 때에만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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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피터 싱어의 동물해방론, 해방인가 또 다른 차별인가
2. 피터 싱어의 동물해방론, 여전한 위계와 서열
요컨대 성차별주의의 본질은 사람들이 흔히 (그리고 싱어가) 생각하듯 단순히 남성/여성이라는 이분법적 구별을 만들어내는 데 있지 않다. 그 본질은 '남자의 자격을 지닌 남성-유사남성-비남성(남자의 자격이 없는 남성 및 여성)'이라는 위계를 만들어내는 데 있다. 즉 성차별주의적인 사회에서도 남성적 가치와 특징을 기준으로 어떤 여성은 남성의 세계로 편입되며 어떤 남성은 남성 공동체 외부로 추방된다. 이성과 언어능력이라는 인간적 가치와 특징을 기준으로 일부 동물을 인격체의 세계로 편입시키고 일부 인간을 비인격체의 세계로 추방하면서 '인간 인격체-유사인격체-비인격체(인간 비인격체와 인간 아닌 비인격체)'라는 위계를 만들어낸 싱어의 입장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오히려 인간중심주의의 본질을 좀 더 정확히 풀어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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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장애인에게 정의란 무엇인가 | 장애 정치의 시선으로 프레이저의 정의론 읽기
4. 인권의 정치, 정의의 경계를 다시 묻다
... 인간 존엄성의 기반은 개별 인간 내부에 존재하지 않으며, 개체[개인]들을 가로지르고 통과하는 사회적 관계 안에 존재한다. 쉽게 말해 인간 존엄성은 그것을 존중하고 보장하는 사회적 관계들 속에서만 존재한다. 내가 이미 존엄한 존재이기 때문에 나의 존엄성이 사회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기보다, 나의 존엄성이 보장되는 사회적 관계들 (그리고 그런 관계들 내에 있는 주체들의 상호작용과 인정) 속에서 나로 비로소 존엄한 존재가 된다. 이 사회가, 그리고 다른 사회 구성원들이 나를 존엄하게 대하지 않는다면 나는 존엄한 존재일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질문을 바꿔야 한다. '인간은 왜 존엄한 존재인가?'가 아니라, '어떤 사회적 관계와 조건 속에서 인간은 존엄해줄 수 있는가?'라고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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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전환
6장 당사자주의의 환상을 넘어 횡단의 정치로 | 장애인 당사자주의 비판적으로 이해하기
3. 횡단의 정치: 뿌리내리고 또 옮기기
... 본질적으로 정체성의 정치는 차이의 정치를 경유해 보편성의 정치에 재포섭된 일종의 '하위 보편주의'에 기초한다고 할 수 있는데, 하위 집단의 구성원 내에서는 다시 일정한 공통성과 보편성을 상정하기 때문이다. ...
횡단의 정치에서는 위치의 고정성보다는 대화가 영향력 있는 지식의 기초가 되는데, 이는 어떤 위치에 있는 주체도 기본적으로 '부분적이고 상황적인' 경험-앎을 지닌다는 것, 그들의 경험-앎에 일정한 공백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또한 집단 현성의 경계를 결정하는 것은 본질주의적 정체성의 차이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정치 현실이다. 여기서 '뿌리내리기rooting'와 '옮기기shifting'가 경계를 설정하는 데 핵심적인 개념 내지 방법이 된다. 대화 참여자들은 각자 자신의 멤버십 및 정체성에 '뿌리내리기'를 하지만 동시에 다른 멤버십 및 정체성을 지닌 주체들과의 교류 및 공감을 위해 '옮기기'를 시도한다. 이와 같은 형식의 대화를 추구하는 것이 바로 '횡단주의transveralism'다. ...
... 횡단에서의 동행은 다른 (소수자) 집단의 구성원들과 일괄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를 달리 내리면서도 자신과 양립할 수 있는 가치와 목표를 공유하는 이들과 해야만 한다. 요컨대 횡단의 정치가 추구하는 정치적 조직체는 통 큰 단결을 통해 동질적인 하나가 되는 '공동체共同體'가 아니라, 서로 다르지만 함께 행동할 수 있는 '공-동체共-動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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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자립과 의존의 이분법을 넘어 공생의 세계로
1. 정립: 부정한 몸들을 '수선'하다
... 휴먼은 자립을 의료적이고 기능적인 정의에 따른 자기돌봄의 수행이 아니라 "정상적인 몸을 조건으로 하지 않는 정신mind의 과정"이라고 규정했다. 또한 사회적 장애 모델을 정립한 마이클 올리버는 자립을 "자신의 삶을 스스로 통제하고 결정할 수 있는 것"이라 말했다. 이러한 자립 개념의 쇄신에 따라 현재 전미자립생활협의회는 자립생활을 "삶에 대한 결정을 내릴 때 타인의 개입 또는 보호를 최소화해, 스스로의 삶을 선택하고 결정하는 모든 과정에 장애인 당사자가 참여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즉 '자기결정권'을 핵심으로 하는 자립 개념이 확립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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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연립: 홀로서기도 의존도 아닌, 함께 서기
... 우리 사회는 사람들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평등을 제한해야 하고, 평등을 보장하기 위해 자유를 제한해야 하는 것처럼, 마치 자유와 평등이 서로 대립적이고 제로섬 관계에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곤 한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평등을 억압하거나 제한하지 않으면서 -즉 폐지하지 않으면서- 자유를 억압하거나 제한하는 조건들의 사례는 없고, 또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 자립과 의존의 관계도 이와 다르지 않다. 예컨대 누군가 어떤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을 때 의지하고 의존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그는 자신의 자율적인 의사에 따른 선택이나 결정을 할 수 없다. 즉 자립생활을 할 수 없는 것이다. ...
결국 의존이 부정적인 낙인으로 존재하는 사회란 인간 간의 신뢰가 무너진 사회와 다름없다. 그리고 그렇게 무너진 신뢰 관계를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화폐 관계가 대체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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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 도전
8장 자기결정권, 나와 너 '사이'의 권리 | 연립의 관점에서 바라본 자기결정권
1. 능력에 따라 누리는 것은 권리가 아니다
즉 하나의 권리는 일반적으로 '권리의 부정 → 권리의 인정 → 권리의 실현'이라는 단계를 거쳐 발전하는데, 능력 부재를 이유로 권리를 제한하는 것은 권리의 부정 단계에서 통용되는 논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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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자기결정권은 사회권이다
... 소극적 권리인 자유권은 타인이나 국가의 간섭과 침해만 없으면 보장되는 반면, 적극적 권리인 사회권은 지방자치단체나 국가가 적극적인 조치를 시행해야만 보장된다.
그런데 어떤 권리가 자유권에 속하는가 사회권에 속하는가를 구분할 때도 우리 사회는 일차적으로 비장애인을 기준으로 한다. 예컨대 이동권right to mobility은 비장애인에게 자유권이라고 할 수 있다. ... 장애인의 이동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거리와 건물 입구의 턱을 없애고, 경사로와 유도블록을 깔고, 공공건물과 지하철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고, 저상버스와 특별 교통수단을 도입하는 등의 적극적인 조치가 필요하다. 이처럼 장애인에게 이동권은 (비장애닝들의 경우와 달리) 사회권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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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모두를 위한 노동사회를 향해
2. 왜 이것은 노동이 아니란 말인가?
홍기빈의 '살림/살이 경제'와 깁슨-그레이엄의 '비자본주의적 경제 형식들'에 대한 논의를 염두에 두면, 동일한 활동이 노동으로 인정되기도 하고 인정되지 않기도 하는 모순을 일단 다음의 두 가지 방식으로 해병해 볼 수 있다. 첫째, 우리 사회에서 작동하고 있는 메커니즘은 '활동 → 가치 → 대가'가 아니라 '활동 → 대가 → 가치'다. ... 이는 소위 화폐의 물신화fetishzation 현상으로, 화폐가 가치를 표상하고 매개하는 수단에서 가치 자체 혹은 지고의 가치가 되어버린 것이다. 둘째, '활동 → 가치 →대가'가 아닌 '활동 → 이윤 → 대가'의 메커니즘이 사회를 지배한다. "무가치하다는 말은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뜻"인데, 여기서 "그 인정의 주체는 자본이고, 기준은 자본을 위한 잉여가치의 생산"이기 때문이다. ...
... 새로운 내용이 많은데 모두 너무 맞는 말이라서 내내 감탄하며 읽었다.
... 이 책에 담긴 내용을 지표로 계속 독서를 하고 공부를 해도 좋을 것 같다.